얼마 전 회사 동료들하고 잡담하다가 갑자기 오래전 에피소드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점심시간이었는지 출근 시간 이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회사 근처에 차를 대고 내리는데 그만 열쇠를 안에다가 두고 잠가 버렸습니다. 바로 앞에 카센터가 있어서 문을 열어 달라고 하려고 들어갔죠. 갈고리 하나로 잠긴 문은 금방 열렸습니다.
그런데 문 따주신 기사분이 제 목에 걸려있던 사원증을 보더니 컴퓨터좀 쓸 줄 아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던지, 도움을 요청하더군요. 사장님 허락 없이 컴퓨터를 켰는데 이게 안 꺼진다는 겁니다. 사장님 출근할 시간 다 되었다고 좀 봐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때 같이 있던 M군과 함께 카센터 사무실로 따라 갔습니다. 전원이 안꺼진다... 저는 하드웨어 문제일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전원 스위치 접점이 떨어져 나갔다던지 뭐 그런문제요.
그런데 사무실 책상 위에 있는 컴퓨터 앞으로 가서는 상황을 재현하는 것을 보니 문제는 훨씬 단순했습니다. 사실 문제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것 보세요, 마우스로 '시작' 버튼 누르고 다음에 '시스템 종료'를 누르고 '확인'을 누르면 꺼져야 하는데 안꺼져요 자꾸 다시 켜져요'
"......"
그 때 제가 본 시스템 종료 창은 분명히 이렇게 되어 있었어요.
어쩌다가 마우스 휠이 돌아갔는지 아니면 키보드를 잘못 눌렀는지, 선택지가 '다시 시작'으로 바뀌어 있었고, 늘 하던대로 했는데 꺼지질 않고 재부팅이 되어서 컴퓨터가 고장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사용자의 눈에는 '다시 시작' 이라는 말이나 '세션을 끝내고 Windows를 종료한 다음 Windows를 다시 시작합니다' 라는 도움말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죠. 분명히 '시스템 종료' 버튼을 를 누르고 대화창을 연다음 '확인'을 눌렀기 때문에 '시스템이 종료' 될 것이라고 생각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암기한 프로세스대로 조작하는 것 외에 다른 인터랙션을 해 볼 생각조차 못 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지만 먼저 대화가 가능한 분위기가 조성 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사용자가 대화 채널을 닫아버리면 시스템이 아무리 친절하게 설명하더라도 인터랙션이 이루어 지지를 않게 마련이죠. 다만 사람들과의 대화와는 달리 현재의 Human-Computer Interface는 1:1의 대화가 아닙니다. 분명히 책상에 앉아서 컴퓨터를 조작하는 사람은 한 명이고 책상 위의 컴퓨터도 한대 지만 책상 위에 컴퓨터는 다른 수천만 명에게도 똑 같은 대화상자를 열고 똑 같은 방법의 입력을 받습니다.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할아버지건, 꼬맹이건, 친구건 가족이건 간에 똑 같은 어투와 똑 같은 단어로 대화를 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세요. 인터랙션이 제대로 이루어 질리가 없습니다. (이를 위해 개인화 등이 해결책이 될 수 있겠지만 아직은 요원한 일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Universal Design과 같은 접근법이 더 바람직 하다고 생각합니다. )
아무튼 저는 컴퓨터를 고쳐준(?) 대가로 잠긴 문을 열어준 비용을 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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